**[엔비디아가 깔아주는 길, 그 위에 누가 서 있나]**


21일 베를린 GTC에서 젠슨 황이 발표한 내용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광 네트워크 밸류체인 지원 프로그램.
엔비디아가 이제 칩만 파는 회사가 아니라는 걸 다시 확인한 순간이었다. GPU 담보로 5000억 달러 금융을 제공하겠다더니, 이번엔 후방 산업의 캐파까지 직접 챙기겠다고 나섰다.

병목이 보이면 직접 해결사로 나서는 것이다.

구체적인 숫자들이 인상적이다.
TSMC와 공동 개발한 COUPE 기반 스펙트럼 X CPO 이더넷 스위치. 그 확대를 위해 대만 협력사들에 선수금을 지급한다.

ASE 자회사 SPIL은 2028년까지 CPO 광학엔진 생산능력을 지금의 30배로 늘린다. 테스트 기업 KYEC는 엔비디아로부터 11억 달러 선급금을 받아 미국에 신규 팹을 짓는다. 앰코와 유니마이크론, 삼성전기도 엔비디아향 물량을 위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다.
베라 루빈 기반 AI 팩토리가 막힘없이 확장되도록, 길을 미리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숫자가 있다.
JP모건은 AI 인프라 믹스에서 네트워크 비중이 10% 초반에서 20% 수준까지 오를 것으로 봤다. 대신 메모리 비중은 30%에서 20%로 낮아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파이 자체가 커지고 있으니 메모리 절대 금액이 줄어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성장의 주도권이 이동한다는 신호다.
병목은 언제나 움직인다.
메모리 병목이 장기 계약과 선수금으로 안정화되는 동안, 다음 병목은 광 네트워크로 옮겨가고 있다.

흥미로운 건 반복되는 패턴이다.
삼성전기가 FC-BGA 투자 자금의 70%를 고객 선수금으로 받는다고 했을 때, 그게 갑을 관계의 역전이라고 썼다. KYEC의 11억 달러도 같은 구조다.
고객이 돈을 먼저 낸다는 건 캐파를 사겠다는 뜻이다. 공급이 부족하다는 증거이고, 그 기업의 이익 가시성이 높아진다는 의미다.
메모리에서 시작된 이 구조가 이제 패키징과 테스트, 광학엔진으로 번지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엔비디아 플랫폼이 진화할수록 대만 협력사들의 역할이 커진다.
TSMC를 정점으로 ASE, SPIL, KYEC, 유니마이크론이 줄지어 서 있다. 광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영토에서도 대만 생태계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다.

전에 썼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대만은 TSMC 하나로 선 게 아니라 설계부터 제조, 패키징, 테스트까지 촘촘히 연결된 유기체라고. 그 유기체가 이번에도 통째로 수혜를 가져가고 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삼성전기는 이름을 올렸다. 다행이다.
그런데 LPU 생산을 담당할 삼성 파운드리의 역할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조건은 분명하다. 2나노 이하 선단 공정에서 수율을 끌어올리고, 첨단 패키징에 성공적으로 진입해야 한다. 그 두 가지가 되어야 비로소 이 판에 자리가 생긴다.
쉬운 일이 아니다. TSMC와의 격차는 여전히 크다.

이건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다.
반도체가 우리 수출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 절반이 메모리에 지나치게 쏠려 있다는 게 오랜 숙제였다.
AI 인프라의 믹스가 바뀌고 있다. 메모리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흐름이라면, 우리는 그 변화에 올라탈 다른 축이 필요하다.
파운드리와 첨단 패키징이 그 축이다.
엔비디아가 길을 깔아주고 있다. 그 길 위에 우리가 설 자리를 만드느냐가 다음 10년을 가른다.

젠슨 황은 병목을 돈으로 뚫고 있다.

선수금을 주고, 금융을 제공하고, 캐파를 미리 사버린다. 제국이 영토를 넓히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다.
그 길은 지금 대만을 지나고 있다.

우리가 그 길 위에 올라서려면, 흉내가 아니라 실력으로 증명해야 한다. 수율로, 패키징 기술로, 양산 신뢰도로.

길은 이미 깔리고 있다. 서두를 시간이 많지 않다.


-10월 22일 아신 이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