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손자 회사까지 상장하는 나라에서] 실적발표를 며칠 앞 둔 23일, SK하이닉스가 솔리다임 IPO를 철회했다.

IT의 신 이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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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손자 회사까지 상장하는 나라에서]


실적발표를 며칠 앞 둔 23일, SK하이닉스가 솔리다임 IPO를 철회했다.
소식을 듣고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올라왔다.

먼저 서글픔이었다.
손자 회사도 아니고 증손자 회사를 떼어내 상장하겠다는 발상. 그게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시장이 우리 증시다.
LG화학이 배터리 사업부를 떼어 LG에너지솔루션으로 상장했던 일이 떠오른다. 2020년이었다. LG화학 주주들은 가장 빛나던 성장 동력을 하루아침에 잃었다. 그 주식을 들고 있던 이유가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지금도 그 사례는 최악의 주주가치 훼손으로 거론된다.

그런데 그 일이 벌어진 지 6년이 지났는데도, 비슷한 구조의 상장이 여전히 테이블에 올라온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고 썼던 적이 있다. 이익이 얼마냐가 아니라 그 이익을 누구와 어떻게 나누느냐의 문제라고.
증손자 회사를 쪼개 상장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그 질문에 대한 우리 시장의 답이었다.

그런데 다른 감정도 함께 올라왔다.
희망이었다.

2020년 LG화학 때도 반발은 있었다. 거셌다. 그런데 분할을 막지 못했다.

이번은 달랐다.
개인 주주들의 반대 여론이 거셌고, 그 힘이 정치권을 움직였다. 결국 대기업의 의사결정을 번복시켰다.
6년 만에 결과가 달라진 것이다.

무엇이 바뀌었을까.
개인 투자자의 비중이 늘었다. 목소리가 결집되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리고 제도도 정비됐다. 물적분할에 대한 반대주주 보호 장치가 생겼고, 여론이 제도의 뒷받침을 받게 됐다.
여론만으로 된 게 아니다. 여론과 제도가 함께 움직인 결과다.

최근 몇 달 사이 비슷한 신호들이 쌓이고 있다.
SK하이닉스가 40조 원 자사주 매입 소각을 발표했다. 삼성전자가 100조 원 규모 주주환원을 내놨다. 그리고 이번 IPO 철회.
시장이 요구하고, 기업이 반응한다. 그 순환이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론의 혁신만 떠받들던 시장이, 버핏의 혁신도 함께 보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축배를 들기엔 이르다.
이번 철회가 주주를 위한 결단인지, 여론 부담을 피하려는 선택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진짜 변화라면 다음 의사결정에서도 같은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 여론이 조용할 때도,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신뢰는 한 번의 행동이 아니라 반복된 행동으로 쌓인다. TSMC가 어려울 때도 주주환원을 줄이지 않아 신뢰를 얻었듯이.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떠올린다.
144년째 짓고 있는 가우디 성당. 가우디는 완공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매일 조금씩 쌓아 올렸다.

우리 자본시장의 변화도 그럴 것이다. 한 번의 철회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사례가 있고, 그다음 사례가 있다.

다만 분명한 건 하나다.
6년 전에는 막지 못했던 일을 이번에는 막았다.
크레인이 서 있는 풍경은 미완성의 증거가 아니다. 아직 짓고 있다는 증거다.

개인 투자자들의 목소리가 시장을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였다. 지금은 들린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은 조금 기뻐해도 될 것 같다.


-10월 23일 오후 아신 이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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