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에서 시작된 일] 처음엔 수첩이었다.

IT의 신 이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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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lpart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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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에서 시작된 일]

처음엔 수첩이었다.

산업을 들여다보고, 기업을 분석하고, 그걸 손으로 적었다. 기자 시절 몸에 밴 습관이었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쓴 게 아니라 내가 잊지 않으려고 쓴 것이었다.

그런데 양이 걷잡을 수 없이 늘었다. 수첩이 쌓였고, 어디에 무엇을 적었는지 찾기도 어려워졌다.
그래서 블로그로 옮겼다.

블로그도 오래가지 못했다.
글이 길어질수록 쓰는 것도 부담이고 읽는 것도 부담이었다. 나조차도 내가 쓴 글을 다시 읽기 버거웠다. 문자의 압박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생각했다. 영상으로 올려보면 어떨까.
말로 하면 더 빠르고, 보는 사람도 편할 테니까.

기대는 크지 않았다.
IT와 반도체는 내용이 어렵다. 수요도 제한적이라고 생각했다. 몇십 명이라도 보면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예상외로 호응이 왔다.
같은 것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이다. 공급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안에서 돈이 어디로 흐르는지. 제대로 설명해주는 곳이 없었을 뿐이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다.
사람이 모이니 파리도 꼬였다.
기업을 분석한 내용을 두고 추천이니 리딩이니 하는 말이 돌았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사실처럼 퍼졌다.
그래서 기업 분석 내용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공들여 만든 부분이었고, 구독자들이 가장 원하던 부분이었는데.
지금도 그게 가장 아쉽다.

콘텐츠의 양과 질을 높이려면 자본이 필요하다.
초기에는 취미처럼 내 돈을 태웠다. 수익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하고 싶어서 했다.
그런데 제대로 하려니 한계가 왔다. 자료를 사야 하고, 사람을 써야 하고, 장비가 필요했다. 열정만으로는 지속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 아카데미와 광고가 수익원이 됐다.

광고를 받으면서 원칙 하나를 세웠다.
구독자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만 받는다.
ETF를 설명하는 광고 같은 것들이다. 그 내용 자체가 공부가 되는 것. 채널의 정체성과 맞는 것. 내가 봐도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것.
거절한 제안도 많다. 금액이 커도 결이 맞지 않으면 받지 않았다. 신뢰는 한 번 금이 가면 복구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참 먼 길을 왔다.
혼자 보려고 적던 수첩이 블로그가 됐고, 블로그가 영상이 됐고, 영상이 채널이 됐다.
그 사이에 수많은 분들을 만났다. 조용히 공부하며 내공을 쌓는 분들, 날카로운 질문으로 나를 더 공부하게 만드는 분들, 그리고 가끔은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분들까지.

바라는 건 하나다.
IT 투자자들의 공부방 같은 곳. 사랑방 같은 곳.
누군가 반도체 공급망이 궁금할 때, AI 인프라의 병목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고 싶을 때, 들러서 한참 머물다 가는 곳.
화려한 수익률 자랑이 오가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각이 부딪히며 생각이 단단해지는 곳.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고, 지금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수첩에 적던 그 마음을 아직 잃지 않으려 한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쓴 게 아니라, 내가 제대로 알고 싶어서 썼던 그 마음.

그게 흐려지는 순간, 이 채널도 끝이라고 생각한다.


-10월 17일 저녁 아신 이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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