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는 성장 위에서만 자란다] 대학 시절 미래학에 빠져 있었다.

IT의 신 이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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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는 성장 위에서만 자란다]


대학 시절 미래학에 빠져 있었다.
내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미래를 이야기하는 학문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앨빈 토플러는 워낙 유명했고, 자크 아탈리라는 이름도 그때 알았다.
2000년대 초반, 우리는 유럽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 자본주의의 폐해와 양극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유럽은 그 질문에 가장 성숙한 답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경제는 성장했고, 이민자를 받아들였고, 세계 질서에 대한 담론을 주도했다. 똘레랑스라는 단어가 그 시절 유럽의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세상은 뜻하지 않게 돌아갔다.
성장이 멈추자 똘레랑스도 함께 멈췄다.
이민자들은 사회에 섞여들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고립을 택했다. 2세들은 극단주의에 쉽게 빠져들었다. 관용은 나눌 것이 있을 때만 가능한 미덕이었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지금 유럽은 물가 상승으로 시위에 홍역을 앓고 있다. 마크롱은 비상계엄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20년 전 우리가 모범으로 삼았던 그 유럽이다.

더 가혹한 건 숫자다.
프랑스 10년물 국채 금리가 6월 말 이후 1.3%포인트 급등했다. 독일 분트보다 1.5%포인트 이상 높아졌다. 이탈리아와 그리스보다 더 비싼 돈을 빌려 쓰고 있다.
GDP 대비 부채비율은 120%에 육박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국채 금리가 명목 GDP 성장률보다 2%포인트 높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부채비율을 낮추려면 성장률이 금리를 이겨야 하는데, 지는 구조다. 가만히 있어도 부채가 불어난다. 가혹한 긴축 말고는 길이 없다.
성장이 없는 나라에서 긴축이 시작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선진국 전체가 비슷한 처지다.
미 10년물 국채 금리가 5.3%를 넘어 20년 만의 최고치를 찍었다. 초저금리의 대명사였던 일본조차 10년물이 1996년 이후 처음으로 3%를 넘었다. 선진국 10년물 금리 중앙값은 4%로, 15년 만에 가장 높다.
2010년대에 경제학자들은 정반대를 걱정했다. 저축이 너무 많고 투자가 부족해서 초저금리가 영원할 것 같다고.
10년 만에 세상이 뒤집혔다.

금리가 이렇게 오른 이유는 셋이다.
하나는 AI 투자 광풍이다. 5대 하이퍼스케일러가 올 상반기에만 3300억 달러를 쏟았다. 올해 8000억 달러, 내년엔 1.2조 달러로 간다. 올해 발행한 회사채만 2300억 달러로 전년의 두 배다. 유틸리티 기업들은 향후 5년간 1.4조 달러의 전력망 투자를 예고했다.
이 정도 민간 자본 수요는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 AI 투자 붐만으로 미국의 중립금리가 0.5%포인트 이상 올랐다는 분석도 있다.
둘은 에너지다. 8개월째 이어진 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혼란으로 유가가 40% 폭등했다. 연준은 매파로 돌아섰고 ECB도 두 차례 금리를 올렸다.
셋은 재정이다. 미국 재정적자가 GDP의 6%, 국가부채가 40조 달러에 육박한다. 연간 순이자 지급액이 1조 달러를 넘어 국방비를 추월했다. 현 금리가 유지되면 10년 내 연 2.8조 달러의 이자를 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환경에서 IMF는 전망을 올렸다.
2026년 세계 성장률을 3.0%에서 3.1%로. 한국은 2.6%에서 3.3%로 크게 상향했다. 한국은행은 3.3%, OECD는 3.7%를 본다.
금리가 이렇게 높은데 성장률을 올린 이유는 하나다. AI 인프라 투자가 그 중력을 뚫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의 핵심 변수가 AI가 됐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수혜가 몰린다는 데 있다.
미국, 한국, 대만. 그리고 반도체와 빅테크 기업. 글로벌 K자형 구조가 심화되고 있다.
수혜 국가 안에서도 다시 갈린다. 반도체 제조와 다른 산업의 격차, 노동자 간 임금 격차가 K자로 벌어진다.
유럽은 그 K자의 아래쪽에 있다. AI 밸류체인에서 유럽의 자리가 어디인지 떠올려보면 답이 나온다.
AI혁명은 유럽에게 더 큰 재앙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국의 양면성이 드러난다.
IMF가 우리 성장률을 크게 올린 건 좋은 소식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전부 반도체라는 게 불안한 지점이다.
우리는 미국 AI 인프라 투자의 채찍 끝에 서 있다. 진폭이 가장 큰 자리다. 올라갈 때 가장 높이 가지만, 꺾일 때도 가장 먼저 가장 깊이 떨어진다.
IMF는 AI 투자 기대가 약화되면 2028년 세계 GDP가 전망 대비 1.1%, 미국은 1.8% 하향될 것으로 봤다. 미국의 충격이 더 큰 이유는 AI 캐펙스가 미국 GDP 성장의 50~74%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반도체가 꺾이면 성장, 세수, 외환 수급이 한꺼번에 약해진다. 안전장치가 없다. 내수는 GDP의 40% 수준이고, 다른 주력 산업은 이미 중국에 밀리고 있다.

그래서 지금 봐야 할 것은 AI 투자가 지속되느냐가 아니다.
그 투자를 떠받치는 돈이 계속 흐르느냐다.
주문서는 진짜다. 마이크론의 RPO 1500억 달러와 320억 달러 예치금이 증명한다. 수요도 진짜다. 토큰 사용량이 증명한다.
끊어진다면 자금 시장에서 끊어진다. 선진국 국채 시장의 지금 모습이 바로 그 경고음이다.

성장이 없는 나라는 관용을 잃는다.
유럽이 그것을 보여줬다. 20년 전 우리가 부러워하던 그 사회가, 성장이 멈추자 어떻게 변했는지.
그래서 AI혁명은 더 가열차게 진행될 것이다. 밀리면 죽는다는 절박함이 모두에게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그 경주의 앞자리에 서 있다. 운이 좋았고, 수십 년간 쌓아온 것이 있었다.
다만 그 자리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떨어졌을 때 받아줄 바닥이 얇다는 것.
호황의 한가운데서 그것을 기억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남은 숙제다.


-10월 18일 밤 아신 이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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